어제저녁 가볍게 하루를 마무리하려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시원한 맥주와 치킨을 곁들여 먹다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평소 주량보다 꽤 많이 달려버렸거든요. 아침에 눈을 뜨니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앓이가 제대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대로 빈속으로 하루를 버티면 위장이 다 상할 것 같아 뭐라도 살기 위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더라고요. 얼큰한 해장국이나 라면 같은 자극적인 국물은 도저히 넘길 자신이 없어서, 제 지친 위장과 간을 가장 다정하게 위로해 줄 수 있는 궁극의 순한 맛, 순백의 흰죽을 끓여보기로 했습니다.
숙취로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주방에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쌀을 불리는 과정입니다. 평소 컨디션이 좋았다면 찬밥을 대충 돌려 먹었겠지만 오늘만큼은 입안에서 씹을 힘조차 없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완벽하게 부드러운 식감이 간절했거든요.
멥쌀을 맑은 물에 깨끗하게 서너 번 씻어낸 뒤, 볼에 담가 최소 한 시간 정도 넉넉하게 불려주었습니다. 이렇게 쌀알이 뽀얗게 수분을 가득 머금고 통통해져야 나중에 끓였을 때 겉돌지 않고 푹 퍼져서 소화가 아주 매끄럽게 잘 된답니다. 쌀이 불어나는 동안 소파에 기대어 쉬면서, 제발 이 죽이 내 성난 속을 얌전하게 달래주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랐습니다.
충분히 불어난 쌀은 체에 밭쳐 물기를 탁탁 털어낸 후, 바닥이 두툼한 스테인리스 냄비에 소복하게 담아줍니다. 평소 흰죽을 끓일 때면 고소한 풍미를 한껏 끌어올리기 위해 참기름을 듬뿍 두르고 쌀알이 투명해질 때까지 달달 볶는 과정을 거치곤 하죠.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숙취로 인해 위장 점막이 극도로 헐고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 아주 작은 기름기조차도 속을 미치게 뒤집어놓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참기름에 볶는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오직 물과 쌀만으로 이루어진 가장 순수한 형태의 무자극 조리법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냄비에 담긴 쌀 위로 맑은 생수를 넉넉하게 부어줄 차례입니다. 일반적인 죽을 끓일 때는 불린 쌀의 5~6배 정도 물을 잡는 것이 정석이지만, 저는 오늘 마치 스프나 미음처럼 훌훌 마시듯 넘길 수 있는 아주 묽고 연한 농도를 원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물의 양을 훨씬 더 여유 있게 콸콸 부어주었어요.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시원한 물이 냄비 속으로 쏟아지며 뽀얀 쌀뜨물처럼 변하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제 뱃속에 쌓인 알코올의 독소들도 저렇게 싹 씻겨 내려갔으면 좋겠다는 실없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물양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맞출 필요 없이, 끓이면서 뻑뻑하다 싶을 때 조금씩 추가해 주면 되니 마음 편하게 부어주시면 됩니다.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처음에는 센 불로 시원하게 가열해 줍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냄비 가장자리부터 하얀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면서 물이 힘차게 끓어오르는데요. 이때부터는 불을 약불로 뭉근하게 줄이고, 나무 국자를 이용해 냄비 바닥이 눌어붙지 않도록 천천히 원을 그리며 저어주어야 합니다.
숙취 때문에 머리는 멍하고 속은 뒤틀렸지만, 조용한 주방에서 죽이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백색소음을 들으며 일정한 속도로 국자를 젓고 있으니 묘하게 마음이 차분하게 진정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뜨거운 수증기 위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갓 지은 밥의 구수한 냄새가 꽉 막혀있던 속을 은근하게 열어주는 듯했습니다.
약불에서 정성껏 끓이다 보면 넉넉했던 물이 서서히 잦아들고, 쌀알이 톡톡 터지면서 진한 전분기가 우러나오기 시작합니다. 나무 국자로 듬뿍 떠서 질감을 확인해 보니, 처음의 딱딱했던 쌀알의 형태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흰 눈이 부드럽게 녹아내린 것처럼 푹 퍼져서 아주 걸쭉하고 찰진 윤기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단계까지 오면 사실상 완성이나 다름없어요. 쌀알이 완전히 반투명해지고 뽀얀 국물과 혼연일체가 되어 몽글몽글한 크림 같은 질감이 될 때까지 충분히 뜸을 들이듯 끓여주면, 지친 위장에 1%의 타격도 주지 않는 궁극의 부드러움이 완성됩니다.
지금 제 눈에는 그 어떤 화려한 진수성찬이나 값비싼 요리보다 더 반갑고 고마운 음식입니다.
알록달록한 색감도, 코를 찌르는 강렬한 냄새도 없는 이 맑고 담백한 비주얼 자체가 널뛰던 위장과 피로한 간에 깊은 안도감을 선사해 주거든요. 식탁에 마주 앉아 갓 끓여낸 이 따뜻한 한 그릇의 온기를 느끼고 있으니, 전날 밤 스스로의 몸을 너무 혹사시킨 것에 대한 작은 반성과 깊은 위로가 동시에 교차합니다.
나무 숟가락으로 조심스레 한 스푼 떠서 후후 불어 입술 사이로 밀어 넣어 봅니다. 입에 닿는 순간, 치아를 움직여 씹을 필요조차 없이 혀끝에서 뭉근하게 사르르 녹아내리며 식도를 타고 스르륵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자극적인 양념이 일절 들어가지 않아 쌀 본연이 가진 맑고 은은한 천연의 단맛만이 입안을 맴도는데, 그 슴슴하고 순한 맛이 헐어있는 듯한 식도와 위장을 따뜻하게 코팅해 주는 느낌이 정말 환상적입니다. 마치 엉망이 된 뱃속에 따스한 온열 찜질팩을 얹어둔 것처럼, 차갑게 굳어있던 속이 뻥 뚫리며 묵직했던 팽만감과 쓰린 느낌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어요.
절반 정도는 이렇게 맑은 상태로 즐기다가, 남은 죽에는 진간장을 아주 살짝 한두 방울 떨어뜨려 먹으니 짭조름한 감칠맛이 확 돌면서 잃어버렸던 생기가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음으로 하루 종일 앓아누울 뻔했던 고단하고 힘들었던 하루가, 이 정성스러운 흰죽 한 그릇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든든하게 회복되는 느낌입니다.